영화 박하사탕 명장면
1980년 광주에서의 기억은 영호의 삶이 전환점을 맞는 지점이고, 순수를 잃어버리기 시작한 때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토록 차분했던 카메라는 계엄령 선포 후, 진압군이 투입될 때까지의 과정을 전쟁보도 화면처럼 핸드헬드로 격하게 잡아낸다. 물론 현대에 와서는 그렇게 드문 테크닉도 아니지만, 그 형식적인 테크닉의 비주얼적 미학과 함께 이미지 내면의 텍스트마저 성취하고 있다. 또한 지금까지의 차분한 스타일에서 튀어나와 흔들리는 카메라는 순수를 좇았으나 철저하게 망가져 격변하게 되는 영호의 인생처럼 전체 스타일에서 툭 불거져 나와있다. 그 이전에 영호가 소중히 모아 온 순임의 박하사탕이 출동하는 군홧발에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모 습은 어쩌면 상투적인 표현이기도 하지만, 가장 함축적이고 명료한 비주얼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경험, 무고한 여학생을 오발로 살해하게 되는 장면. 철도를 감싸고 있는 어 둠 속에서 김영호는 쓰러진 여학생을 붙잡고 오열하고, 주변의 다른 군인들이 다가와 플래시로 그를 비춘다. 김영호는 끝없이 흐느끼며 그것을 잘라내는 페이드 아웃을 뛰어넘는 계속되는 시간의 연장선상에서도 그는 틀림없이 계속해서 흐느꼈을 것이다. 특히 이 장면은 주인공인 김영호를 꾸준히 비추어, 배우를 중심으로 감정적 효과를 얻어내는 연출효과를 얻어내고 있기도 한다. 또한 동기화된 유일한 조명인 군인들의 플래시 라이트가 김영호를 간간이 비추는 모습은 어둠 속에 침전된 채 구원되지 못하는 영호의 심리적 상태를 가장 효과적으로 묘사한 시각화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박하사탕 평론가 비평
한국의 현대사는 정말 고통과 암흑의 연속이었다. 그 암울했던 군사 독재 시절의 잔재는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고, 살인의 추억에서 박현규가 사 가져간 터널 속의 어둠이 두만과 태윤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듯, 비록 지나간 시절이지만 한국의 현대사는 여전히 미궁 속의 악마와도 같은 존재다. 한국의 현대사가 얼마나 그 자체로 드라마틱하고 암울했는가는 역사를 소재로 만들어진 수많은 한국영화들이 증명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은 현대사를 다룬 영화 중 가히 최고로 꼽힐 자격이 있는 영 화다. 이 영화는 말 그대로 격동의 구렁텅이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스러져간 한 남자의 잃어버린 순 수를 영화적 형식의 힘을 빌어 역추적하는 영화이다. 의 구조는 연속되는 일종의 플래시백입니다. 에피소드는 단절되어 있고, 관객이 이곳 영화에서 궁금증을 느끼는 순간, 이야기는 그것에 대한 해답을 주기 위해 과거로 달려간다. 과거에서 현재가 아닌, 현재에서 과거로 흘러가는 구조는 과거에 대한 슬픔과 아쉬움을 대변하는 감독의 태도이기도 하지만, 주인공인 김영호를 필연적인 영화적 흐름의 숙명론 안에 묶어버리려 는 연출의 결과다. 결말은 이미 예정되어 있고, 과거를 거슬러 올라간다고 그 결말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만약 김영호가 이 영화에서 80년의 광주사태를 경험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향 해 달려오던 기차가 멈추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주인공인 김영호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파괴된 사나이다. 그는 야유회에 불현듯 나타나 옛 친구들 앞에서 추태를 부리고 날뛰다가, 기차 앞에 버티고 서서 시간의 절대적 힘 앞에 나약한 자신에게 통한의 감정을 토해내듯 절규한다. 김영호의 얼굴은 그곳에서 정지된다. 프리즈 프레임 스톱모션 역시 엘리펀트에서 언급된 슬로 모션과 함께 시간의 불가역성에 맞서는 영화적 테크닉의 하나이다. 관객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열차 앞에서 절규하게 만들었는가 이 영화 역시 살인의 추억과 마찬가지로 달리는 열차라는 것을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 그래서 영화 내내 열차의 존재는 소리와 이미지를 통해 잊을만하면 부각되어 나타난다. 그런 시간의 흐름 앞에 김영호는 시작부터 몸을 던지며 그 유명한 대사 나 다 시 돌아갈래 를 외친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절대적 힘 앞에서, 감히 그것에 맞설 것을 천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포자기의 태도에서 나오는 당랑거철에 불과하다. 다음 순간 김영호가 어떻게 될지는 뻔한 것이고, 이 오프닝 에피소드는 영화 전체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압축하고 있는 모범적인 형태이기도 하다. 영화는 철저히 리얼리즘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영화이다. 감독 이창동이 시작부터 지금까지 박하사탕을 포함하는 그의 전 필모그래피가 철저하게 리얼리 스트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역사 그 자체를 가장 현실적인 느낌으로 전달하 려는 감독의 선택이었다. 이런 잔혹한 리얼리즘의 역행 속에서 가장 부각되는 것이 바로 주인공 설경구의 연기력이기도 하다. 설경구의 그 절제와 과잉도 아닌 말 그대로 리얼리즘 그 자체인 연기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이 영화가 있을 수 있었을까 하나 특이한 점은 한 사나이의 한국 현대사와 맞물리는, 파멸의 원인을 찾는 회귀로서의 리얼리 즘을 고수하고 있지만 그 와중에 멜로드라마의 관습을 끼워 넣어, 완전한 리얼리즘으로서의 탈피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내 홍자와의 계속되는 갈등과 여비서와의 외도는 그렇다 치고, 끊임없이 호명되는 옛사랑 윤순 임의 순박하고 처연한 이미지라든지, 운동권 학생을 체포하기 위해 내려간 군산의 한 카페에서 만난 여종업원과의 짧은 사랑은 멜로드라마의 형식을 일정 부분 빌려온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쁜 선택이 결코 아니다. 이 영화는 파멸의 원인을 찾는 역 연대기이기도 하지만, 파멸의 원인을 찾는 만큼 순수로의 회귀 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격동의 현대사가 김영호라는 개인을 옥죄어올 때마다, 첫사랑으로서의 윤순임의 존재는 그를 지탱해 주는 지지대가 되지만, 그것은 너무도 미약하다. 형사 김영호가 학 학생을 처절하게 고문한 이후 순임을 마주할 때, 그는 그 학생을 고문하던 그 추악한 자신의 눈으로도 손이 참 예쁘다는 말을 순임에게 듣는다. 다음 순간 그는 그 예쁘다는 손으로 홍자의 엉덩이를 주물러댄다.. 옛사랑의 앞에서 내던지는 이런 위악적인 행동은 그녀를 보다 나은 곳으로 떠나보내려는 영호의 의지이지만, 소통의 부재 속에서 그것은 그 가녀린 연인에게 가혹한 고통으로 다가온다. 김영호는 역사가 강요한 폭행과, 자신 스스로에게 내재되어 있던 폭력성으로 인해 예전의 모습을 잃어간다. 영화적 흐름의 시간순으로 볼 때 그는 오히려 순화되어가고 있는 것이지만, 최후의 순 간 영호가 보여주는 엷은 눈물과 들꽃을 찍는 사진사로서의 자신의 꿈을 언급할 때, 관객은 이미 지 나와버린 그 굳은 현대사의 사슬 속에서 통탄할 수밖에 없다. 모든 역사가 그렇지만, 특히 한국의 지난 현대사에 있어 그것이란 그 자체로 불가역성이죠. 어찌 됐든, 김영호는 그 끔찍했던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압부대로 출동했던 때의 기억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트라우마를 입고 파괴되어 간다. 한데 사실상 군대라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이것 역시 불가역성 선택이지만, 형사라는 직업의 선택은 사실상 김영호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을 것이다. 김영호는 왜 그 끔찍한 기억을 겪고도 형사가 된 것이다. 이것만큼은 정말 제가 뭐라고 쓸 말이 없다. 김영호가 그 상처의 기억으로 인해 속죄하기 위한 수단으로 형사가 된 것인지, 아니면 그 상처가 터트려버린 폭력과 감성의 경계선에서 방황하게 된 것인지 확실치가 않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김영호가 형사로 활동하는 대목은 한국 현대사의 치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무차별적인 고문과 폭행... 이 속에서 김영호는 마치 시계태엽장치 오렌지에서 루도비코 요법을 받는 알 렉스가 생각나게 한다. 조용한 김영호를 비추면서, 카메라는 그 전경에 무차별적인 폭행을 당하고 있는 학생과 끔찍한 보이스 오버를 중첩시킨다. 김영호가 그런 역사의 폭력성에 휘둘리게 되리라는 것은 예정된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 추악한 만행을 일삼던 형사들은 역사의 단락이 바뀌면서 너무도 평범한 중산층 계급이 되어 우리 곁에 머물렀다. 역사에 피로 오명을 쓴 그들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채 당연스레 우리 곁에서 반갑다는 말을 꺼낼 수 있는 존재가 되었으니... 박하사탕의 플래시백 구조는 일종의 내러티브의 구조적인 숙명론에 김영호를 옭아매는 사슬이기 도 하지만, 지난 역사에 대한 변화와 격변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사실 순응적인 이야기 구조야말로 오히려 시간과 역사의 힘에 순응하는 구조다.. 플래시백 구조가 숙명론적이긴 하지만, 그 형식 자체는 시간의 흐름을 철저하게 거스르는 스타일이다. 이창동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한국 현대사에 분노를 던진다. 말하자면 한국영화는 하여튼 기억을 다루려고 한다. 그러나 역사 앞에서 무능하다.
영화 박하사탕 연출방식
이 영화는 역순환적 구조를 통해서, 관객에게 계속해서 과거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한다. 영호는 극단적인 방법인 자살을 택하는가 왜 김영호는 다리를 저는가 왜 김영호는 박하사탕을 사 는가 왜 김영호는 저리도 폭력적인가 이런 질문의 연쇄는 계속되는 플래시백의 구조 속에 관객의 깊은 몰입을 창조한다. 그러나 이런 스타일이 관객의 아주 약간의 인내심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영화의 각 에피소드들을 꿰고 있는 갖가지 사건들은 인과관계에 따라 맞물리면서 통 일성을 부여한다. 이 영화가 관객의 정서를 조율하는 방식은 어쩌면 지극히 고지식할 정도로 `연극적'인 수법에 의존하고 있는데, 바로 카메라는 최대의 리얼리즘적 효과를 위해서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배우에 행동과 대사, 그리고 그의 감정을 통해 관객의 정서와 참여를 이끌어낸다. 그것은 그만큼 지금의 박하사탕을 만든 것은 설경구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이유이기 도 하다.